올해는 현대중공업이 설립된지 50주년을 맞는 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최근 50주년 사사를 발간했다. 현대중공업의 역사는 대한민국 조선산업, 나아가 대한민국 중공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사에 수록된 내용 중 회사 성장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순간을 연재한다.<편집자주>
1969년 10월, 현대는 외국 회사와의 합작 추진이 지지부진하자 조선소 건설 준비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외국 합작선 물색과 함께 부지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1차 예정부지로 울산 내항 염포리 소재 66만1157㎡의 땅을 선정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처음 조선사업을 구상할 때부터 의중에 둔 곳이었다. 바람이 없어 방파제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 매립지여서 지반이 약했다. 지질조사를 시작하자 바로 우려했던 사태가 발생했다. 테스트 파일(Test pile)을 여러 번 반복해서 박아도 계속해서 다시 튀어나오곤 했다. 지반이 마치 스펀지 같았다.
정확한 결론을 얻기 위해 1969년 12월 캐나다 전문 조선소 건설업체에 용역을 의뢰했다. 2주일 가량 머물며 준비해 간 20여 개의 지반 견본을 놓고 외국 기술진과 함께 면밀히 검토했다. 그 결과 조선소 건설을 강행한다면 공사비가 2~3배 더들 것으로 분석됐다.
내항(內港)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정주영 창업자는 다시 한 번 면밀히 지반을 조사하라고 하는 한편 다른 곳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다시 샅샅이 뒤졌다. 그러던 중 외항의 전하만 쪽을 우연히 발견했다. 남쪽으로 미포만, 일산만이 연접해 있으면서 백사장이 고운 해수욕장이었다.
주택은 300호 정도였다. 지형이 좋았고, 무엇보다 튼튼한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파도가 약간 있었으나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됐다. 보고를 받고 내려온 정주영 창업자는 바로 기초조사를 지시했다.
6곳의 지반조사 결과는 아주 좋았다. 조선소 부지는 암반이 너무 적어도 문제지만 너무 많아도 적합하지 않은데 이도 적당했다. 문제는 기후와 해상여건이었다. 의뢰를 받고 현지로 파견 온 독일 아게베세조선소 기술진들도 파도와 풍속을 문제 삼았다. 대형 선박을 건조하려면 파도는 1m 이하, 풍속은 초속 20m 이하여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현대는 국립건설연구소와 중앙관상대에 조사 분석을 의뢰했다. 국립건설연구소는 ‘방파제를 건설하면 파도가 1m 이하로 가라앉을 수 있다’, 중앙관상대는 ‘초속 20m의 바람이 부는 날은 연중 극히 짧은 기간’이라는 보고서를 보내왔다. 긍정적 결과를 받아든 조선사업부는 1971년 중반부터 토지를 매입하는 등 부지 조성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즈음 또 하나의 중대한 결정이 뒤따랐다. 15만~20만t급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를 건설하려던 당초 계획을 전면 수정해 50만t급 이상의 VLCC(Very Large Crudeoil Carrier: 초대형 유조선)를 건조할 수 있는 초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었다.
1970년 6월 제출한 ‘대형조선소 사업승인 신청서’에 따르면 조선사업부는 정부와 협의해 15만t급 규모로 조선소를 세우기로 했다. 1971년부터 단계적인 건설을 통해 마지막 연도인 1974년에 4만2000t급 3척, 2만4000t급 4척을 건조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부지는 1차 예정부지였던 울산시 내항이었으며, 여기에 10만t급 도크 1기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세계 조선·해운 시장에서는 선박의 대형화 추세가 뚜렷했다. 조선업계도 이에 발 맞춰 시설 확장을 서둘렀다.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의 조선소는 이미 100만t급 이상의 설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본의 미쓰비시중공업도 나가사키조선소에 100만t 규모의 도크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대는 앞으로 10만~20만t급 규모의 조선시설로는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업규모 전면 수정을 결정했다. 1971년 7월 척당 최대 건조능력을 50만t급으로 하고, 26만~30만t급 VLCC를 연간 5척 건조한다는 내용의 ‘조선사업계획서’를 확정했다. 조선소의 시설 규모는 부지 51만8512㎡, 건물 12만4334㎡, 드라이도크 1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조선소 건설과 VLCC 건조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한 것. 차관 도입으로 조달한 막대한투자비를 감당하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영업이익을 올리기 위한 획기적인 공기 단축방안이었다.

정주영 창업자는 “조선소나 배를 짓는 것은 다 같은 건설인데, 하나가 먼저 돼야 다음을 건설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꼭 조선소를 지어야 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라며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그 어디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후에도 조선사업계획은 여러 차례 수정됐다. 1972년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면서 최대 건조능력 70만t급 규모로 확대했다. 원래 1기로 잡혀 있던 드라이도크를 둘로 나누어 건설하기로 부지 198만3471㎡(매입토지 99만 1735.5㎡, 매립지 99만 1735.5㎡), 건물면적 14만 1547㎡로 크게 확충했다. 그리고 1년 후 1973년, 다시 최대 건조능력 100만t급 규모로 사업계획을 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