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기에 글로벌 물류 대란으로 대규모 호황을 누렸던 해운사들이 앞다퉈 컨테이너선 발주에 열을 올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부족한 물류 운송을 담당하기 위해 선복량을 늘리는 일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물류 대란 문제가 대부분 해결되고 글로벌 경기 위축 국면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물동량(수요)이 줄면서 선박(공급)이 놀게 되는 공급과잉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시각에서다.
이에 2008년부터 시작돼 글로벌 해운시장을 10년 동안 암흑기로 만들었던 대규모 출혈 경쟁 양상이 재현될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전문가들은 최악 상황에 대비해 정부와 해운사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19일 영국 조선해운시황 전문기관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5월 전 세계에서 발주된 1만2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이상 컨테이너선은 701만CGT(118척)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59만CGT(8척) 대비 11배 이상 늘어난 수준이다.
장기 불황 끝에 찾아온 호황에 글로벌 주요 해운사들이 대대적인 선박 발주에 나선 결과다. 프랑스 해운조사업체 알파라이너에 따르면 현재 글로벌 20위 이상 해운사가 인도받을 컨테이너선 선복량은 587만TEU에 달한다.
이 같은 선박 발주는 코로나19 여파로 항만에서 지체되는 선박이 많아져 선복량이 사실상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도 전자상거래가 급증해 글로벌 물동량이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물동량이 선박 발주만큼 가파르게 늘어나지 않으면 결국 일거리가 없는 선박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제는 내년에 물동량이 급증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올해 예상보다 심각하게 인플레이션 문제가 부각된 탓에 글로벌 주요국들이 기준금리를 급격히 인상하면서 이에 대응하고 있다.
아울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하는 등 글로벌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경기 위축 가능성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글로벌 국내총생산(GDP) 예상 성장률을 지난해 하반기 4.9%로 예상했으나 올해 7월 기준 3.2%로 1.7%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글로벌 경기와 해운 물동량 성장 속도가 상호 관련성이 높다는 측면을 감안하면 선박 발주를 늘린 글로벌 해운사들에는 적신호가 포착된 셈이다. 이같이 수요 위축에 공급과잉이 겹치면서 해운업계 일각에서는 2008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치킨게임'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2000년 초반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국제 교역량이 폭증하면서 글로벌 해운사는 이에 맞춰 선박 발주를 크게 늘린 바 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물동량이 크게 줄었고 공급과잉이 발생해 해운사 간에 대규모 출혈 경쟁이 시작됐다.
당시 글로벌 주요 해운사는 경쟁 해운사에 타격을 줄 목적으로 저가 운임 공세를 펼쳤고, 이에 버티지 못한 해운사가 속출했다. 당시 국내 1위이자 글로벌 7위였던 국적선사인 한진해운도 파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 같은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전문가들은 정부와 대형 해운사가 공급과잉에 따른 경쟁 상황에 대비해 리스크 관리에 착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정부가 해운산업 상황을 냉정히 분석해 적절한 지원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한 해운업계 관계자는 "2008년보다 상황이 낫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급과잉으로 출혈 경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며 "장기간 불황 이후 호황이 끝나고 있는 상황이라 정부와 해운사 모두 내부적으로 여러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