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양탄자의 흠과 바다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와는 달리 카페트 문화가 발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카페트는 바닥에만 까는 것이 아니라 벽에도 걸어 놓고 장식할 만한 곳에는 다 카페트가 보인다.
벽에 거는 장식용 카페트를 타피스트리(tapestry)라고 하는데 크기도 아주 앙증맞게 작은 것부터 벽 한 면을 다 덮는 엄청난 사이즈도 있고 문양이며 화려함과 색도 참으로 다양하다. 타피스트리는 물론 장식용이기는 해도 열을 차단하는 난방이나 냉방효과도 있다.
이러한 카페트 중에서도 바로 페르시아 카페트를 제일로 친다. 그 문양과 섬세함 그리고 감촉에 있어서 최고이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지역으로 동양과 서양문화가 융합되어 문화의 꽃을 피운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완벽할 것만 같은 페르시아의 카페트에도 어딘가 하나씩 조그만 흠이 있다고 한다. 이를 ‘페르시아의 흠(Persian flaw)’이라 한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 양탄자의 흠은 카페트를 만들 때 기술이 없거나 실수로 잘못 만든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우리 인간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지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흠 하나 없이 너무 완벽한 것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조금씩 흠이 있고 상처가 있으기에 항상 겸손하고 그러기에 서로 보완하고 도와주는 가운데 완벽함을 지향해야 하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인 우리들일 것이다.
인디언의 영혼의 구슬이나 페르시아 양탄자의 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인디언과 페르시아의 이야기는 참으로 바다의 속성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바다는 세상 낮은 곳이기에 가장 겸손하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우리는 바다처럼 남보다 ‘낮은 곳에 서야(understand)’한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고 이해가 된다.
그러나 어려울 때는 바다가 항상 그 자리에 있듯이 멀어지지 말고 ‘같이 서야(withstand)’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견디어 내고 이겨’낼 수 있다. 바다가 항상 낮은 곳에 서있고 우리 곁이 있듯이 말이다.
인디언들의 영혼의 구슬과 페르시아 양탄자의 흠처럼 여백과 부족의 아름다움을 가진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2% 부족한 것은 흠이 아니라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