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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바다의 풍운아, 바이킹

진정한 바다의 풍운아, 바이킹

 

유럽에 바이킹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유럽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과는 엄청나게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이란 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바이킹들이 남긴 영향은 엄청나기에 생각해 볼만하다.

 

이러한 바이킹들에 대한 평가도 매우 다양하다. 바이킹의 원조들인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사람들은 자기 나라 바이킹들은 좋은 바이킹이고 다른 나라 바이킹들이 못된 짓을 한 나쁜 바이킹들이라고 농담 삼아 하기도 한다.

 

바이킹이라는 말은 스칸디나비아 지역 등에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협곡이나 계곡을 의미하는 ‘비크 Vik’에 사는 사람들에 유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래된 대표적인 도시가 바이킹들이 건설한 나라인 아이슬랜드의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ik) 이다. 전 세계 수도 중에서 가장 높은 위도에 위치한 수도이다. 그러고 보면 북극권에 있는 많은 도시나 마을이 00비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우연히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바이킹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콜럼부스 보다 500여년 앞선 1,000년경에 이미 발견하고 도착했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이들 바이킹들은 당시에 유럽 북해에 위치한 페로(Faroe) 제도와 아이슬랜드를 거쳐 북대서양의 그린랜드에 도달한 다음 현재의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이고 실제 고고학적으로 이들의 거주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 것을 보면 사실로 받아 들여 진다.

 

이러한 신대륙 발견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워낙 먼 거리이고 또 항해하기에 험하였기 때문에 갈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였던 데다가 바이킹들이 대구 잡이로 돈 벌이가 되는 그곳을 비밀로 하고 밖으로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얼음의 땅 그린란드와 사람이 살만한 땅 아이슬랜드가 이름이 바뀐 것 같은 것은 바이킹들이 사람이 살만한 아이슬랜드에는 너무 사람이 많이 이주할 까 걱정이 되어서 ‘얼음의 땅’이라 하고 또 그린란드에는 너무 사람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녹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거꾸로 붙여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유럽의 북해를 포함한 북대서양은 험하기로 소문난 바다이다. 나도 20여년 전에 커다란 컨테이너선에 승선하여 북해를 건너는 기회가 있었는데 직접 경험한 북해의 파도는 무시 무시 했다.

 

이처럼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험하고 위험 한 곳으로 여겨지는 북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난과 역경의 항해였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에는 통나무로 만들었기에 큰 배라고 해야 3-40미터 정도에 불과한 데다, 돛과 노를 젓는 전통적인 바이킹배로 그 험한 바다를 항해한다는 것은 아무리 바이킹이라 해도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해류와 바람을 잘 이용했다 하더라도 끈기와 열정 그리고 항해술을 가진 대단한 바다인류인 호모 씨피엔스(Seapiens) 바이킹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먼 거리를 항해하여 미지의 대양과 대륙까지 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토 욕심인가 아니면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심이나 정복 욕구였을까?

 

그 이유는 바로 지금의 과학적인 연구결과로 알려지고 있는 물고기 대구의 회유경로였던 것이다. 그들은 회유하는 대구를 따라 신대륙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도 캐나다 동부의 뉴펀들랜드 인근은 대구와 킹 크랩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당시에는 말 그대로 물반 고기반 이었을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야 육지위주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로 물고기를 잡아보아야 해안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이킹들은 여기서 잡은 대구를 염장하고 건조하여 유럽으로 가져가 이를 팔아서 막대한 이득을 남겼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장거리 장시간 항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대구 그 자체였다. 이러한 이야기가 마크 쿨란스키(Mark Kurlansky)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 대구’에 잘 나와 있다. 대구를 염장하여 건조하면 반영구적으로 보관이 가능했기에 항해식량으로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염장 대구는 근대 해양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대구가 선원들의 주된 영양 공급원이 되었다. 염장 대구 없는 대항해는 상상할 수 없었다.

 

몽골과 기병대에게 말과 육포가 있었다면 유럽의 바이킹과 대향해가들에게는 배와 염장대구가 있었다. 서양과 동양, 육지와 바다. 묘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비교되는 모습이다.